불립종배우기
  • 불립종배우기
  • 불법종의 법맥
  •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생과 깨달음

  • 고조 일련대사

  • 일륭성인(日隆聖人)

  • 일선성인(日扇聖人)

  • 석가모니 부처님(불타)은 기원전 620년경, 인도 카필라국의 왕자로 태어나셨습니다. 어린 시절 이름은 ‘싯다르타 태자’로, 아버지는 아들을 훌륭한 왕으로 키우기 위해 최고의 교육과 쾌락을 누리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총명했던 태자는 인생에서 누구나 겪게 되는 ‘태어남(生), 늙음(老), 병듦(病), 죽음(死)’을 보며, 이 세상의 즐거움은 영원하지 않고 참된 행복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이에 태자는 진정한 행복을 찾기 위해 가족과 궁궐의 삶을 뒤로하고 출가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6년간의 고행 끝에, 고행만으로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어느 날 한 소녀가 바친 우유죽을 먹고 기력을 회복한 후, 보리수 아래에 앉아 깊은 명상에 들어갔습니다. 마침내 우주의 진리를 깨닫고, 부처(불타)가 되셨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중국의 천태대사(天台大師)는 부처님께서 50년간 펼치신 가르침을 크게 다섯 시기로 나누었습니다. 각각의 시기는 대표적인 경전(경)을 중심으로 구분됩니다.

    ① 화엄시(華嚴時)
    깨달음을 얻은 직후 21일 동안 설하신 내용으로, 화엄경이 대표 경전입니다. 당시 가르침은 너무 깊어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② 아함시(阿含時)
    보다 쉽게 풀어 설명하기 위해 부처님은 녹야원(사슴 공원)으로 자리를 옮겨 아함경을 중심으로 한 소승불교(자기 수행 중심의 가르침)를 설하셨습니다. 약 12년간 계속된 시기입니다.

    ③ 방등시(方等時)
    제자들의 이해가 깊어지자 이번엔 더 큰 가르침인 대승불교(모든 중생의 구제를 목표로 하는 가르침)를 전하셨습니다. 아미타경, 승만경, 대일경 등이 이 시기에 설해졌고, 약 16년간 이어졌습니다.

    ④ 반야시(般若時)
    ‘지혜’를 주제로 한 반야경을 중심으로 한 가르침입니다. 약 14년간 설해졌습니다.

    ⑤ 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
    마지막 8년 동안, 부처님은 모든 가르침의 정수인 법화경을 설하시고, 열반(이 세상에서의 모습을 마치심)에 들기 전 열반경을 남기셨습니다.
    나무묘호렌게교(南無妙法蓮華經)의 의미 부처님께서는 법화경에서 모든 중생에게 불성(佛性,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이 있으며, 그 불성을 깨우는 열쇠로 나무묘호렌게교(南無妙法蓮華經)를 남기셨습니다.
    이 다섯 글자는 단순한 주문이 아니라, 부처님의 모든 지혜와 자비가 담긴 핵심 가르침입니다. 법화경 방편품(方便品)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부처님은 중생의 불지견(佛知見, 부처의 지혜와 눈)을 열기 위해 이 세상에 나타나셨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참된 이유는 바로 모든 중생에게 “당신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그 방법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부처님 입적 이후의 불교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불교는 인도를 넘어 여러 나라로 전해졌습니다.

    ● 소승불교와 남방불교
    부처님의 초기 가르침, 즉 비교적 쉬운 내용 중심의 ‘소승불교(小乘佛敎)’는 스리랑카와 인도차이나 반도의 여러 나라에 퍼졌습니다. 또 히말라야를 넘어 티베트로 전해지며, 그 지역의 신앙과 결합해 '라마교'로 발전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남쪽 지역으로 퍼진 불교를 남방불교라고 부릅니다.

    ● 대승불교와 북방불교
    불교의 중심 흐름은 중국을 거쳐 한국과 일본으로 전해졌습니다. 이를 북방불교라고 하며, 모든 중생의 구제를 강조하는 대승불교(大乘佛敎)가 중심이었습니다.
    중국에서 불교가 크게 발전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인도 본토에서 불교가 외세의 침략으로 약해진 시기에 많은 인도 고승들이 중국으로 건너와 경전을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서유기’의 실제 주인공인 현장법사(玄奘法師)처럼 인도로 직접 경전을 구하러 간 스님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 여정은 험난했기 때문에 중간에 쓰러지거나 돌아오지 못한 스님들도 많았습니다. 이 때문에 살아서 돌아온 스님들은 자신이 가져온 경전이 부처님의 진짜 가르침이라고 여기며 각각 종파를 세웠습니다. 이로 인해 수·당나라 시기에는 수많은 종파가 난립하게 되었습니다.

    ● 천태대사와 법화경 중심의 가르침
    그러한 혼란 속에서 천태대사(天台大師, 538~596)가 등장하여 당시 존재하던 모든 불교 경전을 두루 살펴본 후, 부처님의 진짜 뜻이 법화경에 담겨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그는 법화경을 중심으로 하는 천태종(天台宗)을 창립하였습니다.

    ● 한국과 일본으로의 전래
    한국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이며, 법화경을 우리나라에 전한 분은 백제의 현광법사(玄光法師)라고 전해집니다. 고려 시대에는 체관법사(諦觀法師)가 중국 천태종을 다시 일으킨 인물로서, 그가 저술한 『천태사교의(天台四敎義)』는 지금도 천태종의 주요 교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후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 스님이 천태종을 한국에 세웠지만, 고려 멸망과 함께 그 명맥은 끊기게 되었습니다.
    한편, 일본에서는 전교대사(傳敎大師, 767~822)가 교토(京都) 근처의 히에이산(比叡山)에 엔랴쿠지(延曆寺)를 세우면서 천태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사찰은 이후 오랫동안 일본 불교의 종합대학과 같은 역할을 하며 수많은 고승들을 배출하게 되었습니다.
  • 탄생과 유학
    불립종의 조사(조상 스님)이신 일련대사(日蓮大士)님은 1222년 2월 16일, 일본의 ‘보슈(房州)’라는 바닷가 마을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본인께서도 “나는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하셨듯이, 평범한 서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맑고 푸른 바다를 벗 삼아,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건강하고 총명한 소년으로 자라났습니다.
    12세 때, 마을에서 약 8km 떨어진 청정사(淸澄寺)로 들어가 수행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16세에 도선방(道善房)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하여, 이생방 렌초(是生房蓮長)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청정사는 천태종 계열의 절이었지만, 당시의 천태종은 ‘천태밀교(天台密敎)’라는 이름으로 진언(眞言)을 외우거나 염불을 중심으로 한 수행을 중시하고 있었습니다. 일련대사도 처음에는 그러한 가르침을 배우셨습니다.
    당시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 시대였습니다. 왕보다 무사 정권인 막부가 권력을 잡았고, 왕을 유배시키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사회는 혼란과 전쟁으로 고통 받고 있었고, 여기에 가뭄과 큰 지진까지 더해져 백성들의 삶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보며 렌초스님은 “불교를 믿는 나라에서 왜 이런 고통이 계속되는가? 그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으로 이 나라를 구하겠다.”는 큰 서원을 세우셨습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 17세부터 가마쿠라, 교토, 나라, 고야산 등 일본 각지의 유명한 절을 찾아다니며, 당대의 뛰어난 스님들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부처님의 모든 경전을 두 번이나 정독하며 깊이 연구하신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셨습니다.
    “부처님의 참된 뜻은 바로 법화경에 있으며, 사람들이 법화경의 가르침대로 살아갈 때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고, 부처님의 가호로 나라 역시 평안해질 수 있다.”
    일련대사의 가르침은 중국의 천태대사가 펼친 법화경 신앙을 계승하고 있지만, 천태대사나 일본의 전교대사(傳敎大師)는 주로 좌선과 명상을 통한 수행을 중시했습니다. 이는 자기 내면을 닦아 깨달음을 얻는 수행 방식으로, 법화경 중에서도 적문(迹門)에 근거한 수행입니다.
    일련대사께서는 이와 달리, 법화경의 본문(本門)에서 설해진 부처님 깨달음의 핵심이 바로 南無妙法蓮華經라는 확신을 가지셨습니다. 즉, 이 다섯 글자를 입으로 부르고 그 가르침을 일상 속에서 실천함으로써, 누구나 부처님의 가호를 받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일련대사의 핵심 가르침입니다.
    교개종과 전법(傳法) 수학과 수행을 마치신 렌초 스님은 1253년 4월 28일, 32세의 나이로 고향 근처 청정산(淸澄山) 정상에 올라 처음으로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법화경의 제목을 외우셨습니다. 이것을 입교개종(立敎開宗)이라고 합니다. 이 날이 바로 우리 불립종의 시작이자, 일련대사님께는 수많은 고난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그날, 청정산 꼭대기에서 입교개종을 선언하신 렌초 스님은 자신의 이름을 일련(日蓮)으로 바꾸고, 마을 사람들 앞에서 설법을 시작하셨습니다. 설법의 핵심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부처님의 여러 설법은 모두 법화경을 전하기 위한 준비였고, 부처님의 참된 뜻은 법화경에 담겨 있다. 그러나 지금 이 나라 사람들은 그 본뜻이 아닌 방편(方便)의 가르침에만 의지하고 있어 부처님의 가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습니다. 그동안 자신들이 믿어온 가르침이 부처님의 본뜻이 아니었다는 주장에 반발한 것입니다. 특히, 그 지역을 다스리던 도조 카게노부(東條景信)는 염불종(淨土宗)의 열성 신자였기 때문에 일련 대사님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밤, 대사님은 청정산을 내려와 수도 가마쿠라(鎌倉)로 향하셨습니다. 그곳에 작은 암자를 지으시고, 매일 거리로 나가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진짜 가르침, 법화경을 믿으세요!"라고 외치며 설법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반발했고, 어떤 이는 시비를 걸고, 어떤 이는 돌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거리 설법을 통해 신심 깊은 제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대표적인 이들이 시조 긴고(四條金吾), 이케가미 무네나카(池上宗仲), 도모키 죠닌(富木常忍) 등입니다. 또한, 천태종 시절 함께 공부하던 동료가 자신의 열 살 조카를 데리고 대사님을 찾아와 제자로 삼았는데, 이들이 훗날의 닛쇼(日昭)와 닛찌로(日朗)입니다.
    다음 해인 1258년, 두 차례 큰 지진이 가마쿠라를 덮쳐 많은 피해가 발생하자, 대사님은 실상사(實相寺)에 들어가 다시 경전을 정독하셨고, 7월 16일에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이라는 글을 집필하여 막부의 최고 권력자 호조 도키요리(北條時賴)에게 올리셨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라에 재난이 끊이지 않는 것은 백성들이 방편의 가르침에 머물고,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이대로라면 외적의 침입과 내란이 일어날 것이다."
    이 글은 명문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막부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대사님을 박해했습니다. 8월 27일 밤, 수천 명의 폭도들이 암자를 불태우며 습격해왔고, 대사님은 도모키 죠닌의 집으로 피신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송엽곡 법난(松葉谷法難)이라고 합니다.
    이듬해, 다시 가마쿠라로 돌아오신 대사님은 또다시 체포되어 이번엔 이즈(伊豆) 지방으로 유배됩니다. 유배 도중, 관리들은 바다 위 썰물 때만 드러나는 바위에 대사님을 두고 떠나버렸습니다. 그러나 지나가던 어부가 대사님을 발견해 자신의 집에 숨겨드리며 보살폈고, 그곳에서도 대사님은 법화경 신앙으로 많은 사람을 구제하셨습니다. 2년 뒤, 다시 가마쿠라로 돌아오신 이 사건은 이즈 이토 법난(伊豆伊東法難)이라고 부릅니다.
    1264년 11월 11일, 43세가 되신 대사님은 고향에 들렀다가 신자 구도 요시타카(工藤吉隆)의 초청을 받고 가던 도중, 예전부터 원한을 품고 있던 도조 카게노부 일당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이 자리에서 구도 씨와 동행한 제자가 순교했고, 대사님도 이마에 큰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이를 고마쓰바라 법난(小松原法難)이라고 합니다.
    한편, 1259년, 몽골은 고려를 정복한 뒤 일본에 항복을 요구했고, 1268년, 공식 서한이 일본에 전달됩니다. 나라 안은 불안했고, 가뭄과 지진이 이어졌습니다. 막부는 당대의 유명한 스님 료간보(良観房)에게 기우제를 부탁했고, 이 소식을 들은 대사님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도전장을 보냅니다.
    "방편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가 기우제를 해서 비가 오면, 내가 법화경을 버리고 당신의 제자가 되겠다. 하지만 비가 오지 않으면, 당신이 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료간보는 유명한 스님들과 함께 기우제를 올렸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비는커녕 바람만 불었습니다. 공개적인 실패로 망신을 당한 료간보와 그를 지지하는 권력자들은 대사님을 제거하려 했고, 1271년 9월 12일, 일련 대사님은 체포되어 타츠노구치 (龍口)라는 처형장으로 끌려갑니다.
    하지만, 제목을 외우고 계신 대사님에게 칼을 휘두르려는 순간, 둥근 빛이 날아와 칼이 세 동강 나고, 형리도 기절했으며, 병사들은 공포에 휩싸여 도망쳤습니다. 이 불가사의한 현상으로 처형은 중단되고, 대사님은 사도(佐渡) 섬으로 유배됩니다. 이 사건을 타츠노구치법난(龍口法難), 유배를 사도 법난(佐渡法難)이라고 부릅니다.
    상행보살의 자각 1271년 11월 1일, 성인은 깊은 눈 속의 쓰카하라(塚原)에 있는 삼미당(三味堂)이라는 곳에 유배되었습니다. 이곳은 시신을 임시로 두던 곳으로, 벽과 천장이 구멍투성이였고, 난방은커녕 음식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염불종을 신봉하던 아부츠보(阿佛房)라는 사람이 일련 대사님을 해치기 위해 삼미당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성인의 인품과 말씀에 깊은 감동을 받아, 부인과 함께 열렬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이 부부는 몰래 음식을 갖다 드리며 대사님을 정성껏 모셨습니다.
    이듬해인 1272년 1월, 지방의 스님들이 모여 대사님과 토론을 벌인 결과, 많은 이들이 감화되어 귀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월, 대사님은 《개목초(開目抄)》라는 글을 상·하 두 권으로 나누어 집필하셨습니다. 이 글에서 대사님은 자신이 법화경에 따라 살아가는 수행자이며, 말법시대 중생을 구제하러 다시 이 땅에 태어난 상행보살(上行菩薩)의 화신일지도 모른다는 심정을 밝히셨습니다. 타츠노구치법난(龍口法難)과 사도(佐渡)에서의 혹독한 유배 생활은, 성인이 자신이 상행보살의 후신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해 4월, 대사님은 쓰카하라에서 이치타니(一谷)라는 곳으로 옮겨졌고, 생활 여건도 다소 나아졌습니다. 이곳에서는 지역 주민들도 성인의 가르침을 직접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1273년 4월 25일, 대사님은 신앙의 중심이 되는 본존(本尊)에 관한 교리를 담은 《관심본존초(觀心本尊抄)》를 저술하셨고, 5월에는 말법시대에 중생이 실천해야 할 수행 방법을 정리한 《여설수행초(如說修行抄)》를 쓰셨습니다.
    《관심본존초》에서는 말법시대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영원한 본래 부처님(久遠本佛)이 상행보살에게 전한 구체적인 본존의 모습을 설명하며, 이를 대만다라(大曼荼羅)라는 형상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이처럼 사도에서의 유배 기간은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성인의 가르침이 깊이 무르익고 중요한 글들이 탄생한 뜻 깊은 시기였습니다.
    1274년 2월, 대사님의 사도 유배형이 해제되었고, 3월, 가마쿠라로 돌아오셨습니다. 사면의 배경에는, 당시 일본이 몽골의 침략 위협으로 불안에 떨고 있었던 상황과, 두 해 전 발생한 반란이 성인의 예언대로 일어난 사실이 있었습니다.
    4월 8일, 막부는 성인을 불러 세 번째로 간언(直言)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막부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자, 성인은 절이나 관직을 주겠다는 제안도 거절하고, 미노부(身延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미노부산의 영주인 하키이(波木井)씨는 성인의 신자로서 성심껏 암자를 지어 맞이하였고, 대사님은 이곳에서 무더운 여름과 혹독한 겨울을 견디며 9년간 제자들을 양성하고 신도들을 가르치며 부처님께 정성을 다해 시봉하셨습니다. 대사님은 생애 동안 약 400여 편의 문서(遺文)를 남기셨는데, 그중 3분의 2가 미노부산 시절에 집필된 것입니다.
    하지만 혹독한 산속 생활과 오랜 세월의 과로로 인해, 그토록 건강하시던 성인께서도 54세 무렵부터 병환을 앓기 시작하셨습니다. 병세는 악화와 회복을 반복했고, 마침내 61세가 되던 해 가을, 제자와 신자들의 간청을 받아 온천 치료를 위해 정든 미노부산을 떠나셨습니다.
    9월 18일, 신자 이케가미 무네나카(池上宗仲) 씨의 저택에 도착하셨고, 25일, 제자들과 신도들을 모아 마지막 설법을 하셨습니다. 10월 3일, 이케가미씨는 자신의 저택을 시주했고, 성인은 그곳을 본문사(本門寺)라 이름 붙이셨습니다.
    그리고 성인은, 이 본문사와 또 다른 중심 사찰인 묘혼지(妙本寺)를 제자 니찌로(日朗)에게 맡기시고, 10월 8일, 여섯 명의 제자들을 육노승(六老僧)으로 임명하셨습니다. 그 제자들은 닛쇼(日昭), 니찌로(日朗), 닛코(日興), 닛코(日向), 닛초(日頂), 니찌지(日持)였습니다.
    10월 10일, 대사님은 유품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고, 11일, 당시 열두 살이던 쿄이치마루(經一丸)를 불러 훗날 교토에 가서 포교하라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10월 13일 아침 8시경, 제자들과 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제목을 부르시며 61세의 생애를 마무리하셨습니다.
    성인 멸후의 종단 일련대사께서 입멸하신 후, 유골은 미노부산(身延山)에 모셔졌고, 제자 여섯 분(육노승)이 번갈아가며 묘소를 지켰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포교가 각지로 확산되자, 묘소 수호는 닛코(日向) 상인이 맡고, 나머지 제자들은 각자의 지역에서 포교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스승의 본뜻과 다른 해석이 생기기 시작했고, 특히 닛코(日興) 상인은 그 차이를 문제삼아 나머지 다섯 노승과 결별하고 후지산 아래에 독자적인 수행처를 세웠습니다. 이로 인해 종단은 다섯 문류(門流)로 나뉘어 전개됩니다.
    다섯 문류의 특징
    문류 대표 중심지 주요 특징
    니찌로문류 日朗 가마쿠라 · 본문사 교단 초창기 중심, 교리 계승
    닛쇼문류 日昭 법화사 유연한 포교, 온건한 교리
    미노부문류 日向 미노부산 성인 묘소 수호, 전통 계승
    토모키문류 富木常忍 자택 중심 평신도 중심 실천 강조
    닛코문류 日興 후지산 대석사 독립적 교리, 강한 수행 강조
    이후 니찌로상인의 문하에서 자란 니찌조(日像) 상인은 성인의 유언에 따라 교토에 들어가 포교에 전념했고, 제자인 묘지츠(妙實) 상인과 함께 묘켄지(妙顯寺)를 세워 처음으로 교토에 법화종 사찰을 설립하게 됩니다.
    묘지츠상인은 1358년, 조정의 요청으로 기우제(祈雨祭)를 집행하여 비를 내리게 하고, 그 공으로 대승정(大僧正)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 공로로 인해, 스승 닛찌로상인과 니찌조상인은 보살(菩薩)호를, 종조이신 일련성인께는 대보살호(大菩薩號)를 조정으로부터 받게 되어, 오늘날 불립종에서는 ‘고조일련대보살’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 탄생과 출가 일륭성인(日隆聖人)은 일련성인께서 입멸하신 지 103년 후인 1385년 10월 14일에 태어나셨습니다. 13세에 ‘원성사(遠成寺)’에 들어가 득도하고, 승려 이름을 ‘심원(深圓)’이라 하였습니다. 학문에 뛰어났던 그는 교토에 있는 천태종의 본산에서 교학을 배운 뒤, 묘본사(妙本寺)에 있던 백부 일존(日尊)과 일도(日道) 스님에게서 일련성인의 가르침을 배우게 됩니다.
    묘본사에서의 수행과 갈등 묘본사에서 일륭성인은 부지런히 수행하여 절에서도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로 인정받았습니다. 주지였던 일제(日霽) 스님은 그에게 ‘경림방일륭(慶林坊日隆)’이라는 이름을 주며 특별히 방을 내주었습니다. 그러나 일제 스님이 입적한 뒤 새로운 주지가 된 월명(月明)은 귀족 출신으로 명예를 위해 승려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절 안에 불량한 자들을 들이며 절의 풍기를 어지럽혔고, 이를 보다 못한 일륭성인은 ‘간효 10개조’라는 상소문을 통해 이를 바로잡고자 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묘본사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유학과 재출발 추방된 일륭성인은 본응사(本應寺)를 세우지만, 월명이 보낸 사람들에 의해 절이 불타는 일을 겪습니다. 이후 그는 일련성인의 가르침을 더 깊이 배우기 위해 관동지방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백부들과 함께 신자들의 지지를 받아 다시 홍법 활동을 시작합니다.
    홍법의 대가 일륭성인은 ‘홍통(弘通)의 대가’로 불릴 만큼 포교에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가 창립한 절은 아홉 곳이며, 그의 설법을 통해 종지를 바꾼 절이 네 곳이나 되어 총 16개의 사찰이 그의 가르침에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의 노력으로 일본 서부 지방에도 일련성인의 바른 가르침이 널리 퍼졌습니다.
    삼정의 기적 – 본엄사 이야기 한 예로, 일륭성인이 삼정(三井)이라는 마을에서 천태종 절 주지인 원징(圓澄)과 법담을 나누다, 그 인품에 감동한 원징이 절 이름을 ‘본엄사(本嚴寺)’로 바꾸고 일륭성인을 모셨습니다. 그 마을은 산불이 자주 나는 곳이었는데, 일륭성인은 언덕 바위에 법화경의 제목을 쓰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산불을 막기 위한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후로 산불은 멈췄고, 마을 사람들은 그 바위를 ‘화복기원석(火伏祈願石)’이라 부르며 지금도 본엄사에 보존하고 있습니다.
    일륭성인의 교학과 저술 일륭성인은 52세부터 72세까지 약 20년 동안 3,000편이 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습니다. 그 교학은 ‘팔품교학(八品敎學)’으로 요약되며 다음 세 가지가 핵심입니다:

    ① 본적승열(本迹勝劣)
    법화경은 앞부분의 ‘적문(迹門)’과 뒷부분의 ‘본문(本門)’으로 나뉘며, 본문이 핵심이므로 적문은 본문을 위한 준비단계라는 교리입니다.

    ② 본인하종(本因下種)
    구원본불(부처님의 본래 모습)이 성불하기 위해 수행했던 ‘묘법(妙法)’이 바로 南無妙法蓮華經이며, 이 묘법을 중생의 마음에 심는 것이 ‘하종’입니다.

    ③ 신행관심(信行觀心)
    법화경 본문에서는 명상이 아닌, 묘법을 믿고 구창하여 부처님의 힘으로 성불을 이룬다는 실천적 수행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일련성인의 본래 가르침을 일륭성인이 명확히 정립한 것입니다.
    입적 모든 활동을 마치신 일륭성인은 1464년 2월 25일, 제자의 부축을 받아 법당에 들어가 염주를 손에 들고 본존을 향해 제목을 부르며 합장한 자세로 조용히 입적하셨습니다. 향년 80세의 장엄한 임종이었습니다.
  • 우리 본문불립종을 창립하신 일선성인(日扇聖人)께서는 1817년 일본 교토(京都)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성인께서는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가정에서 자라셨고, 특히 그림과 서예에 타고난 재능을 지니셨습니다. 10대 시절부터 예술 잡지에 이름이 실릴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보이셨습니다.
    17세부터는 “나가마쓰 세이후(長松淸風)”라는 예명으로 활동하셨으며, 국학(일본 고전학)과 시가(詩歌)에도 능통하셔서 25세에는 귀족들 앞에서 고전을 강의하실 정도였습니다. 학자로서 앞날이 유망했지만 점차 불교에 뜻을 두게 되었고, 26세에 어머니의 별세를 계기로 인생의 무상함을 깊이 느끼며 수행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28세에 교토로 돌아온 성인께서는 제자들에게 서예를 가르치던 중, 본응사(本應寺)의 승려를 만나 법화경 ‘본문’의 가르침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본문법화종에 귀의하게 됩니다. 이후 본응사의 닛쪼(日肇) 상인으로부터 신심을 다졌고, 종단의 석학 니찌요(日耀) 상인을 스승으로 모시며 32세에 출가하여 법명을 ‘무탐(無貪)’이라 하셨습니다.
    이후 성인은 법당 청소, 물 긷기, 불 지피기 등 기본적인 시봉을 하며 수행에 몰두하셨습니다. 수행을 마친 뒤에는 종단의 교육기관인 본흥사 학림에 입학하고자 하셨지만, 이미 학문과 예술로 이름을 알린 성인을 부담스러워한 학교 측은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옛 친구가 찾아와 말했습니다.
    “긴 시간 공부해 높은 자리에 오른다 해도, 중생을 구제하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일련성인의 진정한 제자란 사람을 살리는 데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 말을 들은 성인은 크게 깨달음을 얻고, 학교 진학을 포기한 채 교토에 머물며 수행과 포교에 전념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러나 곧 주변 사람들의 반대로 거처에서 물러나야 했고, 이후 서행암(西行庵)이라는 곳에서 2년간 수행을 이어가셨습니다.
    이 시기, 종단 내부에서는 교학적인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일부 승려들이 “법화경의 제목만 듣기만 해도 지옥·아귀·축생 세계의 중생도 성불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를 삼도성불론(三途成佛論)이라 하며, “수행 없이도 조상의 제사나 공양만으로 성불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이는 불교의 인과(因果) 사상은 물론, 일련성인의 가르침과도 배치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선성인의 스승을 중심으로 종단 내에 개혁의 흐름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1857년 1월 12일, 일선성인은 타니가와(谷川)의 신도 집에서 네 명의 신도와 함께 본문불립강(本門佛立講)을 여셨습니다.
    “이 가르침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고조 일련성인, 그리고 일륭성인께서 세우신 종지를 잇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불립종(本門佛立宗)’이라 부른다.”
    이렇게 일련·일륭성인의 순수한 법화경 가르침을 이어받아, 모든 사람을 구제하기 위한 새로운 포교의 첫걸음을 내디디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불립종의 시작이었습니다.
    본문불립강은 처음엔 네 명의 신자가 신도의 집에서 시작한 작은 모임이었지만, ‘현증이익(現證利益)’을 나타내는 포교 방법으로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개강 5년 후인 1862년, 종단 최초의 사찰인 법화당(法華堂)이 오쓰(大津)에 건립되었습니다.
    포교가 활발해지자, 1868년 7월, 오쓰 지역의 64개 사찰이 위협을 느껴 일선성인을 모함하고 감옥에 가두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이른바 ‘오쓰 법난(大津法難)’이라 불리며, 이후 모함이었음이 밝혀져 성인은 석방되었고, 종단은 정식으로 포교의 자유를 인정받게 됩니다.
    1869년 1월 10일, 성인은 교토의 유청사(宥淸寺)를 본문불립종의 도량으로 삼으셨습니다. 유청사는 일련성인의 제자 니찌벤(日弁) 상인이 세운 사찰로, 일련성인이 직접 개안(開眼)하신 일련성인존상(日蓮聖人尊像)이 전해져 오는 귀중한 절입니다. 이 존상은 오늘날 교토시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 이후 유청사는 본문불립종의 본산(本山)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